교육>칼럼>여유 | 문화
관리자 | 조회 2139 | 2018-02-07 13:45
옛 마을을 지나며
나는 시를 좋아한다. 시에는 마침표가 없다. 문장이 길지 않고 짧다. 짧지만 그 속에 메타포가 있다. 즉자적으로 바로 알 수도 있지만 읽고 난 후 알 수 없는 묘한 여운이 남아 있음이 시다.
나에게 언제 인지 모르지만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묻어있는 시가 한편 있다.
"찬서리
나무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늦가을이 되면 동네 어귀마다 있는 감나무에 홍시 한 두개가 남아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에 감은 남아나질 않지만 나무 꼭대기의 감은 무사히 살아 남아있다. 이 마저도 땅에 떨어지거나 까치들의 밥이 되기 십상이다. 감 따먹고 몇 개 남아서 까치밥이 됐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인은 남겨 놓은 감이 까치를 위해 남겨놓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짧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시다. 삶이 팍팍하거나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살 때면 가끔 이 시를 낭송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 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김남주 시인의 시라는 것을 빼곤 아는 게 없었다. 아마도 대학 때 이 시가 좋아서 어느 노트에 베껴놓았고 외웠던 것 같다. 시를 낭송도 하고 암송도 하지만 막상 이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이 시를 조우했다.
어느 날, 사무실 2층에 있는 서고에 서류를 찾으러 갔다. 서류더미 한켠에 시집들이 쌓여 있다. 오래 된 책들과 시집들이 얼기설기 같이 놓여있다. 무슨 책들인지 한권 집어 제목만 보고 다시 내려놓는다. 시집은 보니 신경림 농무, 한 때 좋아했던 허영란 시인,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지었던 유안진 시집도 있다. 다시 보고 싶어 한쪽으로 빼놓았다. 그만 볼까 하다가 맨 끝에까지 보았다. 끝에는 뜻밖에 김남주 시인의 시집이였다. '사랑의 무기'. 서류를 찾으러 갔다는 생각은 못하고 오래된 시집만 몇 권 집어 들고 나왔다. 집으로 가져가 볼 요량으로 퇴근할 때 가방에 넣었다. 며칠 동안 책장에 꽂혀있었고, 새벽에 문득 깨어 김남주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김남주 시인은 혁명시인이자 민족시인이다. 남민전 사건으로 9년 동안 복역하고 세상에 나왔다. '사랑의 무기'는 그동안 써놓았던 시를 모아 89년도에 발행한 시선집이다. 내가 본 시집은 2002년도에 다시 발행한 13쇄의 책이다. 시집치고는 약간 두터웠지만 천천히 읽어 갔다. 그만 볼까 하다가 혹시 그 시가 있을까 싶어 끝까지 읽어나갔다. 맨 끝장 하나가 남았다. 이 시집이 아닌가 하다가 끝장을 넘기는 순간 아주 짧은 시가 있었고 제목은 "옛 마을을 지나며"이다. 첫 문장을 보는 순간 알았다. 그 시라는 것을. 내 머리 속에 남아있던 시 한편이 어느 시집에 수록되었는지 모르고 살았는데 김남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사랑의 무기" 맨 마지막 장에 있었다.
지금의 세상은 마지막 남아있는 감 하나도 모두 따 먹어버리고 새에게 베풀 여유가 없다. 삶이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더라도 까치를 위해 홍시하나 남겨둘 줄 여유를 찾고 싶다. 다시 한 번 이 시를 나지막이 읊조려본다.
오충렬(전주시평생학습관)
헬스케어뉴스 객원기자